비탈릭 부테린, 주코 윌콕스, 사이먼 데 라 루비어, 산티아고 시리.
이들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분야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 인사들로,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블록체인 콘퍼런스에 참여해 의견을 밝히고 토론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들이다.
지난달 24일부터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사흘간 열린 래디컬x체인지(RadicalxChange) 콘퍼런스는 행사의 외연만 놓고 보면 다른 암호화폐 콘퍼런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참여자들도 대체로 익숙한 면면이었다. 그러나 콘퍼런스에서 오간 대화는 기존의 논의와 전혀 달랐다. 암호화폐 이론에 대한 논의보다는 기술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변화에 관한 주제만 가지고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다. 래디컬x체인지 콘퍼런스는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암호화폐 콘퍼런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래디컬x체인지 재단이 주최한 이 행사는 2018년에 출판한 글렌 웨일과 에릭 포스너의 책 ‘래디컬 마켓’을 읽고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행사였다. 래디컬x체인지 재단의 제프 리야우 이사는 “이 책은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를 어떻게 개선하고 세계의 번영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콘퍼런스의 기조연설자로 나선 비탈릭 부테린은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을 토대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이들이 특히 이 책에 많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이더리움의 창시자 부테린은 비트코인이 세상에 나온 2009년 이후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커뮤니티에서는 사회 전반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고 말했다.
부테린은 사이퍼펑크 운동과 래디컬x체인지 운동 간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과 이상주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관한 열의, 실제로 실험을 해본다는 것 등이 둘의 공통점이다.”

비탈릭 부테린의 기조 연설 슬라이드.
래디컬x체인지 재단의 공동 대표이자 암호화폐 투자 기업 어멘텀(Amentum)에서 자문으로 일한 맷 프루잇도 부테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둘 사이의 연관성은 굉장히 뚜렷하다. 이더리움과 암호화폐는 협업과 공동 행동을 위한 새로운 도구 역할을 한다. 또한, 권력을 더 고르게 분배한다는 블록체인의 비전은 곧 래디컬x체인지의 비전이기도 하다.”
아이디어 실현
블록체인 식별 플랫폼 유포트(uPort)의 이사 조슈아 셰인과 이더리움 재단의 연구원 에바 베일린, 암호화폐 지배구조 스타트업 커먼웰스 랩스(Commonwealth Labs)의 성장을 이끌고 있는 톰 아이비, 블록체인 기반 클라우드 컴퓨팅 등록소 와이어라인(Wireline)의 공동 창립자 루카스 가이거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들은 미국 각지에 래디컬x체인지 지부를 직접 세웠다. 시애틀의 조슈아 셰인과 디트로이트의 톰 아이비가 대표적이다. 또한, 래디컬x체인지 운동이 지지하는 아이디어들은 블록체인을 통해 실제로 다양한 실험을 거치고 있다.
컨센시스(ConsenSys)의 전 개발자이자 이더리움 기반 음악 소프트웨어 서비스 우조(Ujo)의 창업자인 사이먼 드 라 루비어는 지난달 블록체인 예술 프로젝트를 출범했다. ‘래디컬 마켓’에서 논의되는 하버거세(Harberger Tax, 개인의 소유권과 공동의 소유권을 조절해서 사회 전반의 복지를 강화하기 위한 경제 정책)를 도입한 프로젝트다. 해당 디지털 예술 작품은 상시 판매 중이며 어느 시점이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작품이 이전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의 소유자는 1년 동안 작품 가격의 5%를 세금으로 낸다.
루비어는 “예술가에게 일종의 생계비를 제공하는 한편,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자금 흐름에 관한 정보도 일정 정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출시 이후 작품의 주인은 세 번 바뀌었고, 현재 888이더, 약 1억 5천만 원이 책정되었다. 그러나 루비어는 이러한 방식의 예술 작품 판매가 효과적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사이먼 드 라 루비어의 “이 작품은 항상 판매 중”.
중요한 것은 이 실험이 ‘래디컬 마켓’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루비어는 “책을 읽으며 아이디어를 통해 예술을 진흥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여러 스타트업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저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아이디어를 실제로 이행한 사례는 이 외에도 많이 있다.
오픈소스 협업 플랫폼 깃코인(Gitcoin)도 자본을 통제하는 자유급진주의(Capital-constrained Liberal Radicalism, CLR)라는 이름으로 아이디어를 실험에 옮겼다. CLR은 ‘래디컬 마켓’은 물론 부테린과 웨일, 하버드대? 박사생 조이 히트지그가 함께 쓴 논문에서 강조한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부테린은 팟캐스트 방송 언체인드(Unchained)에서 본질적으로 CLR 메커니즘은 “신뢰할 수 있고 상호 간에 진행되며 특정 조직에 치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공공재로서의 자금을 분배한다고 말했다.
깃코인이 진행한 첫 번째 CLR에서 총 26개의 이더리움 프로젝트에 38,242달러가 분배되었다. 깃코인은 블로그를 통해 이번 실험에 130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후 수차례 깃코인에서 CLR 매칭이 진행되면서 이더리움 개선 제안서(EIP) 1789에서 제시하는 인플레이션 펀딩 메커니즘에 관한 커뮤니티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더리움 재단의 연구원 에바 베일린은 이렇게 말했다.
“이더리움 재단이나 모로크DAO(MolochDAO) 등의 보조금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CLR과 관련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든든한 지원군
이렇게 흥미로운 실험이 잇달아 진행되고 이더리움 커뮤니티가 비교적 높은 관심을 보이는데는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과 ‘래디컬 마켓’의 지은이 글렌 웨일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슈아 셰인은 패널 토론에서 암호화폐 커뮤니티가 전반적으로 “새로운 시스템과 메커니즘 변경에 더욱 개방적”이라고 지적했다. “암호화폐 커뮤니티는 처음부터 우리의 아군이자 든든한 지원군이다. 실제 세상에서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실험도 블록체인 환경에서는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
루비어는 이더리움이 아직 시험을 거치지 않은 참신한 애플리케이션을 설계하려는 개발자들에게 “우호적”이라고 강조했다.
부테린은 분산원장이라는 블록체인의 특성이 아이디어를 위한 시험대가 되어줄뿐 아니라 래디컬x체인지의 아이디어를 사회에 적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제곱 투표, 하버거세, 경매 등 다양한 시스템이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블록체인이 이러한 시스템을 직접 해보기 편리한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간극
부테린은 또한, 새로운 기술이자 사회적인 운동으로서의 블록체인이 여전히 답하지 못한 문제들이 많다며 이와 관해 노정된 한계 때문에 커뮤니티가 둘로 갈라지고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중 하나는 신원에 관한 것이다. 부테린은 “신원을 확인하고 인증하는 시스템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혼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신원 확인 시스템은 한편으로는 소유권과 특정 대리인의 행위를 연관 지을 수 있어야 한다.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다양한 방식으로 암호화폐를 보유한 지갑 주소의 프라이빗 키를 특정 사용자와 연결해 검증한다.
부테린은 또 다른 기능으로 진짜 사람과 가짜 사람(sock puppet)을 식별하는 것을 꼽았다.
“사람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지만,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또 다른 신원 문제는 커뮤니티에서 회원제를 공식화하는 것이다.”
부테린은 커뮤니티의 합의를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 어렵다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합의를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 프로그파우(ProgPoW, 작업증명 방식의 이더리움 채굴 과정에서 ASIC 채굴기를 쓰지 못하게 막는 새로운 코드)에 이더리움 커뮤니티가 모두 합의했다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 해킹으로 도난당한 자금을 되찾아야 하는 문제에 관한 합의는? 암호화폐 자산을 콜드스토리지 등 보관소를 임대해 수탁하는 데 대한 합의는?”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두고 실질적이고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 부테린은 블록체인을 위한 다면적인 신원 확인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궁극적인 난제를 푸는 열쇠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웨일은 이것이 탈중앙화 신원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데이터 구조가 블록체인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맷 프루잇, 제니퍼 린 모론, 글렌 웨일. 글렌 웨일이 래디컬x체인지 재단의 신임 공동 책임자로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웨일은 “올바른 데이터 구조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연구원 니콜 이몰리카가 제시한 ‘교차 소셜 데이터 구조’”라고 설명했다.
“어머니의 생일을 예로 들어보자. 어머니의 생일은 어머니가 태어난 날이지만,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낳은 날이기도 하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자 정보에 여러 명이 연관된 셈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정보 가운데 이런 특징을 지닌 것들이 상당히 많다.”
웨일은 다른 여러 정보와 ‘연관된’ 개인 정보 저장소를 운영하기 위해 유동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데이터 구조를 도입하면 더 나은 신원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록체인은 글로벌 체인과 프라이빗 키 사이에 양극화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네트워크나 커뮤니티 기반의 접근 방식이 옳다고 본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부테린은 “블록체인은 신원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두지 않지만, 부테린과 웨일은 모두 블록체인 운동과 래디컬x체인지 운동이 각자 신원 시스템을 매우 다르게 인식한다고 지적했다.

래디컬x체인지 2019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비탈릭 부테린
웨일은 블록체인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프라이버시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지적했다.
“많은 이들이 ‘내가 내 데이터를 지켜야 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데이터를 판매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래디컬x체인지의 관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한 사람에 관한 데이터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데이터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혼자서 이 데이터를 온전히 소유하고 판매해도 되는 것일까?”
웨일은 개인정보에 대한 통념을 반박했다.
“개인주의와 극단적인 중앙화는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탈중앙화를 개인주의와 연관짓는 것은 명백한 실수가 될 수 있다. 오히려 탈중앙화의 가치와 궤를 같이 하는 건 집합적인 조직이고, 조직의 다양성이 탈중앙화를 보장한다.
블록체인에 기록되는 데이터 가운데 순전히 개인이 만들어내고 오롯이 개인이 소유하는 데이터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직으로서 인간을, 즉 사람들이 포함된 다양한 조직을 제대로 대표해 구현하지 못하는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망가진 시스템일 뿐이다.”
두 운동의 차이점
웨일은 두 운동이 시작된 방식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명확하게 구분하고자 한다.
“블록체인을 통해 큰돈을 번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블록체인과 래디컬x체인지가 얼마나 다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 래디컬x체인지에선 큰돈을 버는 사람이 없다.”
웨일은 또 블록체인은 채택률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반면, 래디컬x체인지는 채택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왼쪽부터 제프 리야우, 아난야 차크라바티, 맷 프루잇, 제니퍼 린 모론, 마크 루터. 래디컬x체인지 재단의 이사인 제프 리야우가 사회자로 래디컬x체인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토론을 이끌고 있다.
“내가 희망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은 채택률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운동이 적절한 속도로 진행되어 사람들이 시스템의 결함을 이해하고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웨일과 부테린은 블록체인 운동과 래디컬x체인지의 운동 간에 차이가 있다고 인정한다.
루비어는 “두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도 분명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관점의 차이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조슈아 셰인은 반대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블록체인과 래디컬x체인지가 실험을 중시하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혁신”한다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두 커뮤니티는 앞으로 더 나은 솔루션을 찾고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더리움 재단의 에바 베일린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은행 같은 기존 방식의 금융기관에서뿐 아니라, 기존 시스템의 업무 처리에서 불편을 겪는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